어느 꼬마 아이의 이야기

어느 꼬마 아이의 이야기

지금 제가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그리 오래지 않은 이야기랍니다.

아주 조그마한 아이가 살고 있었죠. 피부가 뽀얗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징이 없는 꼬마였어요.

그 아이는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살았답니다. 집안에는 토끼나 닭같은 조그마한 동물에서 돼지처럼 큰 동물까지도 기르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집에서 말입니다. 마당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고, 집 뒤로는 옹기 그릇을 만드는 옹기 공장이 있고, 집 앞 논두렁을 따라 가면 기차길이 머리 위로 저만치 지나가는 개울이 있는 그런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6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도회지에서 살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아이의 교육을 위해 데리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무척이나 낯설은 분위기였고 그동안 정들었던 곳을 떠나기가 싫었는지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로 버텼답니다. 물론 아이의 아버지는 꼬마 아이의 고집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조기 교육이 꼭 필요한 시절이 아니기도 했구요. 그 꼬마 아이는 7 살이 되는 해에 도회지로 가기로 약속을 하고 1 년간을 시골에서 더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시골에서 살던 그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번은 기르던 토끼들이 토끼장이 열린 틈에 모두 뒷산으로 도망가 버렸답니다. 토끼들에게는 다른 세상을 보는 기회였을 겁니다. 비록 온 가족이 대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들고 쫓아 다닌 덕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말입니다. 참… 토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토끼의 갓난 아이를 보신적이 있습니까? 핏빛이 비쳐서인지 주황색의 반투명한 젤리처럼 생겼답니다. 하지만 확인하기 위해서 토끼의 갓난 아이를 만져보지는 마십시오. 풀만 먹는 토끼지만 갓난 아이에게서 다른 짐승의 냄새가 나면 어미 토끼가 죽여버린다고 하니까요.

여하튼 1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꼬마 아이는 도회지로 올라왔습니다. 꼬마 아이에게는 4 명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이렇게 말입니다. 그 아이는 국민학교라는 곳을 다니게 되었고 1 학년 음악 시간에 배운 ‘안녕’이라는 노래말 때문에 눈물을 펑펑 흘린 것을 보면 마음이 무척이나 여렸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더 자라 국민학교 3 학년이 되자 한가롭던 시골에서는 겪지 못할법한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장사도’ 선생님이셨는데 시인이셨죠. 그래서인지 미술 시간과 국어 시간이 되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서 커다란 도화지에 예쁘게 붙여서 만드는 시화를 많이 만들었답니다.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나라에서도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폭동, 광주 사태라로 불리워졌던 적도 있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난 해였으니까요. 아이는 처음에는 즐거웠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날마다 집안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숨어 지내야 한다는데 아이는 조금씩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좀 더 자라서는 당시에 집밖으로 나가 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아이는 그때 일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해에 아이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경험을 처음 하게 됩니다. 조립식 모형이라는 걸 처음 만들어 보게 되었으니까요. 형과 함께 학교앞 문구점에서 ‘기동 전사 간담’이라는 로보트를 하나 사서 집으로 들고 왔습니다. 형과 같은 걸로 샀죠. 다 만들고 나서 뿌듯한 마음이 채 식기도 전에 아이는 뭔가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보트의 팔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찬찬히 설명서를 다시 읽어도 도무지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형의 로보트는 잘 움직이는데 말이죠. 거의 울상이 되어서야 형에게 물었고 형은 간단하게도 접착하지 않았어야 하는 부분에 그 꼬마 아이가 접착제를 바른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아이의 첫 경험은 이렇게 엉망이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아이는 조립식 이라는 것에 빠져 들게 되었고 5 학년이 되자 부모님께서 말리실 정도로 심각해 졌습니다. 한동안은 만들지 않는 척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시작하게 되었죠.

같은 해 이런 취미 활동에 일시적으로나마 종지부를 찍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컴퓨터를 사 주셨죠. 8 비트 MSX 컴퓨터. 지금의 시각으로도 보더라도 참으로 훌륭한 컴퓨터였습니다. TV에 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보다 비싼 모니터를 사지 않고도 칼라로 된 화면을 즐길 수 있었고, 플로피 디스크란 것도 없이 일반 오디오 테이프에 저장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아이는 행복했습니다. 열심히 컴퓨터를 배웠습니다. 부모님도 대견해 하셨습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자기가 만든 것이라면서 화면에서 이런 저런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신기하셨으니까요. 아이는 처음으로 베이직이란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색깔 지정도 간단했고, 무엇보다도 스트라이프라는 (포토샵의 레이어나 플래쉬 애니메이션에서의 레이어간의 충돌을 인지하는 방식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기능을 사용해서 간단한 오락을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이는 애플II 라고 하는 다른 기종의 프로그램을 MSX 의 베이직 언어로 바꾸는 작업에도 재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MSX 용 프로그램들보다 애플II 의 프로그램이 더 재미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베이직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너무 느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어셈블리를 배우는 거였습니다. 아이는 열심히 배웠습니다. 책을 읽고 직접 만들어 보고… 그러나 어셈블리는 그리 호락호락한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제는 그런게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았습니다. 시중에 수많은 잡지와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굳이 그 아이가 새로이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도 쉽게 구해서 쓰거나 소스를 얻어 수정할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어셈블리에 대한 좌절감으로 인해 그 아이의 컴퓨터에 대한 열정이 약간은 사그라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부모님의 충고로 고등학교 2 학년이 되는 해에 정들었던 컴퓨터를 깨끗이 닦아서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소프트웨어를 그에 합당한 가치를 제공하고 이용하는 End User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무럭 무럭 자랐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했고 지금까지 손을 놓았던 프라모델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프라스틱에는 색이 칠해지지도 않는 포스터 칼라로 칠을 했지만 이제는 에나멜과 래커라는 물감을 사용해서 칠을 하게 됩니다. 날이 갈수록 아이의 실력은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친구들의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든 프라모델을 주곤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것을 가지고 보관할 수 없는 징크스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지금도 그 아이의 집에는 온전하게 보관된 작품이 그다지 없답니다. 어쩌면 만들고 있을 때의 즐거움만을 만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다. ‘프라모델 회사를 만들리라. 그리고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리라. 그러기 위해서 관련 업체에 입사해서 열심히 배우리라.’ 현명한 생각이었습니다. 프라모델이라는 것이 썩지 않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완전한 악성 재고라는 것이 거의 없으니까요. 십수년이 지나 먼지가 뽀얗게 쌓인 물건도 언젠가는 팔리게 되니까 말이죠. 물론 물건이 좋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그 아이는 국내 굴지의 프라모델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습니다. 물론 직원을 뽑는다는 말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무대포 정신이었을까요? 그러나 회사의 인사 담당자로부터는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긍정적인 대답을 얻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아이는 행복했습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이었으니까요.

3 개월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아이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모형점에 전시될 프라모델을 만들고 방송사에서 만드는 문화센터를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서점을 만드는 일을 했었고, 지금까지도 무엇인가를 계속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있답니다.

아이에게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마냥 행복하기만 했으니까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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